본문 바로가기
사진 이야기

삶의 빛 - 어린 시절의 기억, 사월의 봄볕

by likebnb 2010. 7. 12.



제가 어릴 적에 국민학교 사학년, 새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도 사월 초였지요.


간밤에 신열이 오르고 의식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이 나는 것은 검정 테두리에 하얀 바탕을 한 벽시계가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던 것과, 열려 있는 창 밖은 깜깜했던 것, 그리고 누군가가 창 밖에서 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의 두 가지는
객관적인 사실임에 틀림 없는 것이고 마지막의 그것은 내 귀에만 들렸던 환청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기억나는 것을 종합해보자면 그날 오후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팠을 것이 분명한데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전혀 모르겠고
단지 저녁 아홉시에 잠에서 깨어난 듯 잠깐 의식이 분명해졌었다는 것과 그 때 밖으로 나가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창 밖에서 나를 부르는
그 환청을 쫓아서 말이지요. 그러는 나를 분명 부모님께서 만류하셨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또 기억이 없습니다.

후일 들은 바로는 그날 저녁 이후 간밤에 상당한 양의 코피를 쏟아냈고, 또 목으로 넘어간 엉긴 피를 토해냈다고 하더군요.
다음날 어머니 등에 업혀서 택시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잠깐 또 의식이 돌아왔었는데 그땐 목으로 계속 엉긴 피를 넘겼던
고통스런 기억만 있습니다.

어쨌든 병명은 이렇습니다. 유사열병, 그러니까 열병은 열병이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으로 대표되는 그런 증상은 없는
그나마 다행인 열병이 당시 나에게 찾아 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나서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고,
후로도 며칠은 쉬어야만 했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는 사진, 이 사진을 담아내는 것은 저에게 그 어린 시절의 열병을 기억나게 하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며칠 동안 저는 봄볕이 따사로운 마당,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냈었지요.
사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사진이 저에게 특별한 것은 당시 제가 살고 있던 집의 대문이 이 사진의 그것과 흡사하게 닮은 까닭입니다. 물론 특별하게
기억할 만한 그런 특이한 대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평범한 것이지요.  다만 근래에는 보기
힘들어진 옛날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하겠지요.

그 일이 있은 후 강산이 세 번은 족히 바꼈을 세월이 지났습니다. 저기 대문에 드리워진 봄볕을 보자니 일주일 동안 자식이 죽을까봐
맘 졸이셨던 어머니의 봄볕 같이 따사로운 손길이 그리워집니다.


가회동 한옥마을에서 유년시절의 아팠던 기억을 추억하면서...